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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의 가치
52
관리자
06.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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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의 가치
생명체, 사회 집단의 고결함, 안정성,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경향이 있을 때 환경의 가치는 옳은 것이다.
- 알도 네오폴드
그것이 대부분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새로운 윤리”가 아니라 더할 나위없이 일상적 윤리에 대한 더 전반적인 충실이다. - 존 패스모어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우리가 새로운 종교를 발견하거나 옛것을 다시 생각할 때까지 현재의 생태계 위기를 모면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 린 화이트
많은 현재의 기술에 대한 개념은 환경적 영향들과 그런 영향을 이끄는 자세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우리는 기술이 파괴적 형태들로부터 환경 보호를 촉진하는 환경 윤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저자들이 각각 과학, 철학, 종교의 관점에서 말했다. 연속적인 면에서 나는 각자 이러한 원리로부터 환경 윤리에 대한 잠재적인 공헌을 조사하겠다. 3가지 환경의 가치에 대한 배경(자원의 유지 가능성, 환경의 보호,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중)에 대해 묻겠다. 3가지 문제에 도달한 결론은 책 여기저기에서 특별한 정책의 분석에 영향을 줄 것이다.
Ⅰ. 과학과 환경 가치
우리는 우선 금세기 자연에 대한 변화하는 과학적 관점과 생태학 발전에 대해 생각하겠다. 새로운 생명 중심의 윤리관의 기초로써 생태학 이용을 시도한 사람 또한 존재했었다. 이전 장에서 계속되는 나의 관찰에서 나는 현대 과학에 의해 알려졌을 환경 윤리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 하나에 기초를 둘 수 없다.
1. 자연의 새로운 견해
17-18C 기계론적 자연관은 자연을 이용하는 경향을 성장시키는 한 요인이었다. 뉴튼과 그 추종자들은 자연이 결정론적 법칙에 따라 비인간적인 집단과 힘을 작용함으로써 형성되었다고 말했다. 뉴튼 자신은 신에 의해 고안된 복잡한 기계와 같은 자연관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많은 계승자들은 자연의 이용에 대한 망설임이 없었다. 만약 자연이 기계라면 자연은 본래의 권리와 이권이 없고 우리도 자연을 이용하고 교묘하게 다루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뉴튼의 세계관은 비인간적 세계와 인간성의 뚜렷한 분리를 계속했다. 그것은 인간 의식과 별개로 세계는 운동의 분자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뉴튼은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받아들였다. 데카르트는 동물은 마음과 감정이 없는 기계라고 주장했다. 그는 세계가 우리를 “자연의 지배자”로 만든 실질적 지식을 찬양했고 그는 그런 지배권을 정당화한 우리의 훌륭한 합리성을 생각했다. 반면에 뉴튼은 과학의 목적은 이해라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은 자연 지배에 대한 더 큰 우월성을 주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과학의 목적은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아는 것이 힘이다”, “신성한 유산에 의해 자연 이상의 권리를 발견하라”. 베이컨의 “뉴 아틀란티스”는 조직적으로 확장된 인간성의 올바른 주권을 통해 과학적 엘리트가 될 것과 제도의 연구를 요구했다.
19C 산업가들의 출현으로 자연의 지배는 이론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점점 실현됐다. 산업 혁명의 선두 주자들에게는 환경은 근본적으로 원료의 원천이었다.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개인의 자원 소유권은 상업적 이익의 원천으로서 자연 세계를 다루는 법을 촉진했다. 생활 수준 향상과 함께 환경에 가해지는 짐은 늘어나게 됐다. 고대 이래로 삼림 개간, 과다 방목, 토양 부식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세기 동안 발전한 기술은 오염을 낳고 전례 없는 양의 자연 자원들을 소비했다. 기계론적 과학, 이원론적 철학, 산업 기술, 자본주의 모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부추겼다.
그러나 다른 목소리들은 지배적인 태도에 대한 반대에서 일어났다. 18C 후반과 19C 초반의 낭만주의 문학은 산업 혁명과 뉴튼의 과학에 의해 길러진 자연관에 반작용하는 분야였다. 이를테면, 블레이크, 워스워쓰와 괴테는 자연은 비인간적 기계가 아니라 인간성이 조합된 하나의 유기적 과정이라 했다. 인간 최고의 능력은 이성적 분석이 아니라 감정과 상상이다. 신은 원격 시계제조인이 아니라 자연 세계에 내재하는 생명력이다. 직관은 생명의 상호관계라는 유기적 통일체의 조화를 터득한다. 자연 환경에서 한 개인은 치유력도 발견할 것이다. 신성한 존재, 평화와 기쁨의 경험임을 발견할 것이다. 다른 낭만적 작가들은 자연 그대로의 장엄한, 손대지 않은 풍경, 숲과 강을 찬양했다. 그들은 문명에 의해 타락하지 않은 “고귀한 미개인”을 이상화했고 그들은 “원시적인 것”과 “지배적인 것”을 찬양했다.
뉴 잉글랜드에서 초월론자들은 자연 영역의 신성한 존재에 관한 같은 관점에서 언급했다. 헤리 쏘린은 자연은 영감, 생명력, 정신적 부활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자연은 우리에게 인간성과 순진 무구함을 가르쳐 준다. 쏘린은 비인간적 도시 생활의 곤경, 기술 산업 주의의 성장, 풍요, 진보라는 광적인 목적을 비판했다. 월든 폰드에서 홀로 1년 반의 생활은 그를 인간에 의해 창조물들과 자연의 안정성간의 상호 관계를 파괴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는 해답으로 평온과 평화를 발견했다. 망가지지 않은 자연은 그가 높이 평가한 질의 표본과 우리에게 있어 이 질들을 내놓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문명 포기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는 문명과 자연과 함께 라는 삶 사이의 균형과 교대, 삶의 획일화를 봤다.
여권 운동가들은 자연과 여성의 이용 사이의 관계를 지적했다. 그들은 서구 문명에서 널리 퍼진 이분법들을 언급했다. 정신과 자연, 마음과 육체, 이성과 감성, 객관성과 주관성, 그리고 지배와 굴복. 우리 문화에서 이러한 각 쌍들에 있어 첫째 형태는 남성들과 같이, 둘째 형태는 여성과 같다. 기술 경제 조직은 남성에 의해 거의 독점적으로 운영된 환경을 해쳤었다. 독재 사회는 상호 이익과 협동, 교육보다는 제약과 경쟁, 권력을 더 평가했다. 여성은 삶의 관계를 더 인식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계급 조직적인 명령을 반대하고 사회와 자연에서 다양성을 환영하는 경향이 있다. 이 저지들은 여성과 환경 운동가들이 자연과 여성을 해치는 우월의 사회 구조와 이원론으로부터 찾고자 하는 해방과 공통된 근거를 만들 수 있다.
19C-20C 동안 과학 자체 안에서의 변화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고취시켰다. 이전 책에서 나는 자연의 오늘날 진화적이고 긴급하고 역사적인 것처럼 보여진다. 자연은 계급적 단계가 존재한다. 각 단계는 더 큰 상호 의존적 조직뿐만 아니라 성분 요소 부분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현대 과학은 인간 중심이 아니다. 인간성은 현대 삶과 진보적인 역사에 있어 자연의 일부다. 이러한 생각들은 많은 과학 분야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생태학 분야에서 특히 명백하다.
다윈의 저서는 물론 생태학을 위한 방법을 비교함에 있어 중요했다. 그의 저서에서 인종은 삶의 다른 형태와 연속성에 있어 자연의 일부분으로 다루어졌다. 진화 역사나 연재 어형론과 행동에 있어 모드 동물의 삶과 구분되어지는 뚜렷한 비연속성이 없다. 진화론은 인간성의 독특한 지위(다른 형태들 사이에서 발견될 수 있는 인간 최고 능력에 동등한 지위)를 손상시키는 것 같다. 게다가 다윈의 연구는 생태계에서 복잡한 상호 작용의 균형과 생명 조작의 상호 관계를 발표했다. 인구동태학에 있어 다음 조사는 육식 동물과 먹이 관계, 양식 원천과 주거지를 포함한 그들의 환경에 대한 생명체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생물학적 종의 취약성과 다양성, 상호 의존의 인식은 모두 생태학에 있어 중심적 사고이다.
금 세기의 러첼 카슨의 저서들은 낭만주의의 자연 회상과 정신적 일체감을 과학 지식에 연결했다. 그녀의 영향력 있는 책, 조용한 봄에서 생태학적 양심에 대한 요구는 새 군집에 대한 살충제 효과의 과학적 연구에 연결됐다. 1970년대 초까지 많은 책들은 공기 오염, 방사선 폐기물, 수은, 납, 질산, 인산, 살충제의 증가하는 많은 위급한 결과를 묘사하고 있었다. 생태학이라는 단어는 공용 용어에 들어가게 됐다.
20C 생태학에서 4가지 개념은 특별히 중요하게 되었다.
1. 생태학 개념 : 생명 집단에서 생명체들의 상호 의존과 유기체들 간의 복잡한 상호 작용은 생태학자에 의해 상세하게 밝혀졌다. 그들은 다양한 종을 연결하는 먹이 사슬과 쉽게 뒤집힐 연약한 균형과 혼합체와 요소들의 연결 굴레를 묘사했다. 서로 관련된 생명 조직은 한 체계 조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한 관점에서 변화는 다른 관점에서 멀리까지 오랫동안 미치게 할 수 있다.
2. 유한한 한계 : 어떤 군집의 성장은 한계와 마주친다. 환경은 무한한 수행 능력이 없다. 인간 이외의 군집들에 있어 성장은 먹이 고갈과 서로 다른 종과의 경쟁, 자기 영역 수호와 같은 기구에 의해 제한되었다. 인간의 경우도 인구 크기나 자원 소비, 오염 생산에 있어서나 무한하게 성장할 수 없다. 생태학의 가장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무제한된 성장에 관한 대표적인 가설에 대한 도전이다.
3. 생태학의 안정성 : 균형은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나가고 들어오는 유동적 균형이다. 안정성은 계속 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조절과 균형이 양립하는 것이다. 균형은 자주 한 방향에서의 변화는 반대 방향에서 반대 영향을 일으키는 조절과 제어의 재생 기구들에 의해 달성된다. 생태계의 다양성은 적응성과 안정성에 기여한다. 매우 작은 수의 식물 종과 동물 종으로 된 계는 변화하는 상황과 육식동물, 질병에 더 약하다.
4. 오랜 기간 : 생태학자들은 시간과 공간에 있어 멀리 떨어진 오래가는 영향과 간접적 결과들에 관하여 관심이 있다. 연속성과 유지 가능성은 장기간 비용의 소비가 단기간 이익이 아님을 보여준다. 생태학자들은 많은 시대를 거쳐 변화한 인구를 연구한다. 그들은 미래 세대뿐만 아니라 다른 종들에 미치는 우리의 행동의 결과에 관하여 숙고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장한다.
생명 집단의 취약성 인식은 생태학자들에게 인간의 간섭을 제한할 것을 주장하게 했다.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생물 영역에 의존하고 그들은 지배와 통제를 기획한 공간에서 인간성과 자연과의 협동을 주장한다. 어떤 우리의 행동 결과는 돌이킬 수 없거나 확장된 시대 넘어 많은 비용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 제한되었을 때 원인 관점에서 실수가 있을 수 있다.
많은 과학자들은 중대한 생태계 문제로서 “성장”에 초점을 맞추었다. 폴 에리히와 자렛 하딩에 의하면, 인구의 억제는 모든 다른 문제들을 무색하게 해결한다. 성장의 한계와 영국의 생존에 대한 청사진은 산업 성장의 제한이 오염 수위를 낮추고 자원의 보존을 이룩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연구는 산업 생산과 인구에 대한 “비성장” 또는 “평형을 유지하는 정상 상태”의 정책을 주장했다. 그들은 지연되는 효과의 전망과 줄어드는 자연의 보답의 법칙에 달하는 환경의 수행 능력을 확장하고 기술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자원 보존 기술들은 저자들이 인식했던 것보다 더 장래성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에 그리고 한계가 있고 취약한 자연 환경에 대한 우리의 의존을 더 깨달을 수 있게 만든 과학자들에게 감사할 수 있다.
2. 생물 중심적 윤리관
1949년에 처음 발표된 알도 네오폴드의 “모래의 나라 알마낙”은 환경 운동의 고전이 되었다. 이들 수필은 한 사람으로서 그의 시적 감수성과 자연주의가로서 그의 직접 체험, 삼림 야생 생활자로서 그의 작품, 과학자로서 네오폴드의 이해를 반영했다. “윤리의 땅”이라 이름 붙여진 장에서 생태학의 개요의 어떤 윤리적 함축 의미를 설명한다.
그가 쓴 윤리 범위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사회 전반에 의해 결정된다. 노예들은 주인의 도덕적 책임이 없는 것에 대한 재산으로 취급됐다. 윤리 역사는 종족, 나라, 보든 사람을 포함한 사회의 경제 확장으로서 해석될 수 있다. 네오폴드가 주장한 다음 단계는 지배자가 아니라 시민과 그 일원으로서 그들 자신을 볼 지역 사회 전체이다.
네오폴드의 생물 사회에 대한 발표는 인간의 영향에 의한 파괴와 육식 동물과 먹이의 상호 작용과 대지의 수행 능력과 생태계 피라미드와 먹이 사슬의 생각을 상세히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생각한 계몽된 이기주의를 표방할 만큼 충분하지 못하다. 대부분 종은 경제적 가치가 없지만 그들은 존재할 권리가 있다. 요구되는 것은 윤리 발전의 새로운 단계가 된다.
도덕적, 미적으로 무엇이 옳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편리한 방편이 무엇인가의 관심에서 각 문제를 조사하라. 생물 사회의 고결함, 안정성,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경향이 있을 때 옮은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그릇된 것이다.
옳은 행동은 “생물 사회의 아름다움과 안정성, 고결함”에 대한 중요성 관점에서 정의된다. 여기에 그 기준은 전체 생태계에 유익하다. 고결함, 안정성, 아름다움은 전체론적 개념이다. 그들은 각자의 이익 총합으로 얻어진 기능들을 모으는 것보다. 전체 계에 더 기여한다.
네오폴드의 경우에 이 전체론은 생태학자로서 간단하지 않고 시인, 사람으로서 그의 개요로부터 나온다. “저 대지가 한 사회라는 것은 생태학 기본 개념이다. 그러나 사랑받아야 하고 존경받아야 할 저 대지는 윤리의 확장인 것이다.” 그는 새로운 태도와 가치 그리고 교육적, 종교적 재도 뿐만 아니라 과학적 지식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그는 그의 지향 방침은 더 실제적인 것을 통해 쏘린, 미어 그리고 낭만주의 시인들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네오폴드에 있어서 자연과 같은 배경은 종교적보다는 과학적이다. 그러나 그의 전체론적, 개인적, 경험적 관점은 지나쳐서는 안된다. 생태계에서 그가 추구하는 질은 미적, 직관적으로 또한 생물학적 기준으로 판단되었다.
네오폴드 생각의 토대로 많은 저자들은 생태계의 번영은 최상의 가치라는 전체주의적 진리를 항변하고 있다. 그들은 그런 전체주의가 다른 대안의 이타주의로부터 근본적 출발임을 보여준다.(심지어 동물의 권리 운동이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해도 동물의 고통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그것은 식물의 가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체주의자들은 이와 대조하여 그것이 생물 사회에 기여함에 있어서 모든 존재 가치가 있다고 한다.
J. 바리드 칼리코트는 의식하지 못한 많은 나무와 식물을 포함하는 생물 사회 전체에 대한 네오폴드의 공헌을 지지했다. 그는 꿀벌과 같은 어떤 종들은 그 사회에서 독특하게 중요한 역할이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어떤 박테리아는 개들보다 자연의 경제, 건강에 더 큰 가치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더 존중할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육식 동물들은 파괴적으로 보이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그들은 먹이 공급의 균형에서 군집의 억제에 의해 그들의 먹이에게 이롭다. 칼리코트는 비록 논리적이지 못하지만 흄의 신념과 일치하는 생태계 윤리학을 주장한다. 친척 의식과 동료 의식에 의해 고취된 “도덕적 감정”에 우리는 모두 자극을 받았다. 칼리코트는 우리는 모두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넓은 사회에 속해 있다는 것을 간단하게 보여준 생태학과 사회에 긍정적 태도를 가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생태학은 우리의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개념에 의해 우리의 가치를 바꾼다. 그것은 옛날의 도덕 감정의 중심을 휘젓는 것들 간의 관계를 나타낸다.”
빌 데발과 죠지 세션은 그들의 책 “심오한 생태학”에서 생물 영역의 평등을 주장했다. 그들은 모든 자연의 본래 가치와 통합을 받아들임으로서 (오직 인간성 추구를 위한 환경을 보호하는) 피상적 생태학을 초월할 수 있다고 했다. “생물 중심의 평등의 직관은 그들 자신 각 형태를 번영할 그리고 생물 영역에서 모든 것들이 살아서 번창할 권리를 똑같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데발과 세션은 주된 감소를 인구에 요구하는 생물 영역의 번영과 현재 증가하는 생태계에 대한 인간의 간섭을 주장했다. (인간의 간섭을 비판) 그들의 관점은 생태학에서 부분적으로 나왔고 그 이유는 이 책에서 인용했다. 그들은 그들의 상호 의존, 통합, 전체의 직관은 또한 동양의 명상적 전통과 서양의 스피노자의 자연 숭배(범신론)와 같은 일원론적 철학에서 나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고는 철학적, 종교적 원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중 장에서 잘 논의할 가치가 있다.
만약 개인의 권리보다 생태계 번영을 더 중요시한다면 생물 중심의 윤리 평론가들은 전체주의로 통하는 문을 점유할 것이다. 한 예로 그들은 칼리코트의 설명을 인용했다. “비인간적인 현대 환경의 범위는 그것이 생명 중심인지를 재는 기준이다” 그리고 만약 생물권의 번영이 단지 기준이라면 인구를 감소해야 할 방법에 어떤 제한이 있는가? 칼리코트는 윤리 자체를 발전시키고 많은 도덕심을 더 많은 생물 중심의 윤리 안에 확장시켜야 한다고 답했다. 아직까지는 인간의 가치는 충돌이 존재할 때 짓밟을 수 있다면 불확실한 것 같다. 돈 마리타는 생태계 번영이 유일한 의무와 가치의 원천이라는 생각없이 어떤 의무와 가치의 원천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일찍이 심오한 생태계의 대표자 아네 매스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다른 종들의 요구가 주변의 인간의 이익을 짓밟게 될 것이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인간의 요구에 의해 짓밟히게 될 것이라도 말했다. 어째든 그는 생물 영역의 평등이라는 전제로부터 나온 그런 결론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나는 생물계 밑에 인간을 포함할 것을 주장했고 생태학자들은 문화와 인간 본성의 구분된 모습들을 부정한다. 생물 중심적 윤리는 다양한 생물 사회의 개체들의 이익이 충돌할 때 결정을 내리는 어떤 배경도 주지 못한다. 나는 전체주의적 접근을 호응했으나 저자들은 지나치게 전체주의를 내세운다. 그들은 자주 생명체들과 생태계를 비교한다. 반면에 나는 생명체 기능 부분보다 본래의 가치와 독립성을 더 많이 갖는 개체들의 사회를 통합하는 생태계를 주장한다.
나는 생태계가 인간이든 아니든 상호의존적 각 객체들의 번영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생태계 보존을 주장한다. 우리는 모든 단계에서 경험의 본래 가치와 상호 의존을 인식하는 철학 과정을 근본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각자 다른 형태의 경험 사이에 큰 변화가 있고 경험을 할 수 있는 개인이라고 주장한다. 이 설명에 의하면 생태계 보존은 다른 가치의 결과 그리고 생명의 선제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가치의 정의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목적은 생태계의 건강과 양립이어야 한다. 그러나 목적은 후자를 제외할 필요가 없다. 한 개인이나 사회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가장 특이한 잠재 능력을 잃게 할 지 모를 생물학적 요구를 만족하는 것에 오직 관심이 있다.
Ⅱ. 철학과 환경적 가치들
기술의 환경적 충격(위협)들에 관한 철학자들의 대부분의 저술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원칙에 대한 공식보다 유사한 윤리적 원칙들에 대한 확장에 몰두해 왔다. 오늘날의 공리주의자들은 환경으로부터의 인간적 이익과 위험들이 이전에 알려진 것과는 더욱 별개의 그리고 더 중요한 것임을 인정한다. 공리주의자들의 체계는 동물들과 고통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생물들의 복지뿐만 아니라, 미래의 세대들의 이익과 비용을 포함하여 확장되어 왔다. 동물들에게 권리가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과연 그들에게 의무를 지고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농업적인, 산업적인 그리고 정책들을 수용하는 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질 것이다.
1. 환경으로부터의 인간의 이익들
환경주의자들에 의해서 주창된 많은 법안(한계)들은 인간 복지에 대한 그들의 공헌에 의하여 정당화되어질 수 있다. 인간 중심의 위치(관점)는 우리의 비인간적(인간 이외의) 자연에 대한 의존을 인정한다면 착취적 자연 지배(개발)로 이끌 필요가 없다(이끌지 않는다). 환경은 우리에게 생물학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미학적으로 중요하다. 식량, 건강, 풍부한 물질, 그리고 개인적 만족들은 전적으로 생활권(생활 환경)에 의존한다. 밝혀진 인간적 자익(self-interest)은 환경을 보존하는 행동에 강력한 지지를 제공한다.
많은 철학자들은 오늘날 필요한 것이 새로운 환경학적 지식의 관점에서 전통적 형태의 윤리들의 조심스러운 적용이지 새로운 환경 윤리들이 아니라는 점을 주장해 왔다. 예를 들어 John Passmore는 과학적으로 세련된 공리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인간의 이익에 관한 것만으로 출발해서 우리가 환경을 파괴한다면 인간은 자멸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자연에 대한 어떤 책임도 인간에 대한 책임들에 기인한다. 대략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인간적으로 유용함의 기준은 인류가 조심스러운 (자연에 대한)개입을 지지하도록 한다. 인류는 자연의 상처받기 쉬운 것을 감안하는 동시에 “자연을 인간화 그리고 완전”하게 해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William Frankena는 인간의 행복을 위한 위임은 환경적 행위에 대하여 충분한 정당함을 가지게 한다. 고전적인 윤리 원칙들은 잘못에 있지 않다.; 이 잘못들은 원칙들에 도달하지 못한 그리고 지혜롭게 원칙들을 적용하지 못한 인류에게 있다. Frankena는 동물들의 고통에 관한 것이 윤리적 범위에서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인간 복지나 미학적 즐거움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제외한 무감각의 생물에 대한 의무에는 그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산업 기술에 의한 대기, 물, 그리고 토양의 오염은 명백히 인간의 건강과 개인적 성취에 해롭다. 호흡기 질환과 대기오염의 상호관계는 충분히 입증되었다. 수질 오염은 건강에 위협을 초래하며, 휴양의 장애, 그리고 사람들에게 유익한 수중 생물의 생존을 위협한다. 살충제와 유독성 물질의 남용은 암과 신경계통의 상처를 입힘을 보여 왔고, 그들의 체내 누적은 먹이사슬의 최고 위치에 있는 인간에게 더욱 심각해졌다. 인간의 생명 유지 체계에 유해한 것은 무엇이든지 인간에게 유해한 것이다. 윤리적 배경과 실제인 정치적 정책 모두의 측면에서 환경적 가치들은 이것들이 인간의 자아실현에 필수적인 것이므로 방어(보존)되어 질 수 있다.
심지어 야생 동물의 보존은 비록 많은 유익들이 덜 효과(눈에 띄는)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의 인간 생활에 대한 공헌으로도 정당화되어야 한다. 가장 확실한 유익은 휴양이며,--캠핑, 사냥, 낚시, 카누 타기, 도보여행(산행) 등등--어떤 지역에서는 지나친 사용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한 제도들이 있을 정도로 인기 있는 것이 되어 왔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은 또한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다. 처음에 언급되었듯이, 19세기의 낭만주의자들은 야생의 자연 상태에서의 아름다움을 감상했고, 야생 동물들은 서구 사회의 미술계와 문학계에서 널리 사용(소재로써)되어 왔다. 도시화와 기술사회의 스트레스들이 증가함에 따라, 그리고 야생 동물들이 더욱더 위험에 처함에 따라, 이러한 휴양적이고 미학적인 가치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이 되어 왔다.
인간 특성에 대한 야생 동물의 긍정적 영향은 또다른 눈에 보이지 않는 유익이다. 나무와 산들의 고독은 자연적 순리와의 조화 속에서 내적 안정과 강함, 생을 위한 기회들의 원천이다. 야생 동물들은 우리에게 도덕적 교훈을 가르칠 수 있다.;우리는 겸손함과 감사함뿐만 아니라, 야생의 도전에 직면함에 있어서 스스로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자연은 우리가 중요시하는 자유와 순전함과 용기의 상징이 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야생 상태를 보존해야만 한다는 주장들이 있어 왔다. 자연 상태의 강과 숲에 대한 파괴는 우리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이러한 자연적 현상들로 상징되는 인간 가치에 대한 공격일 것이다. 이러한 자연 상태의 이상은 비록 사람들이 낭만적인 관점에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기술과 도시에 타락한 영향을 받지 않은 인간 천성이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주장되어질 수 있다.
다른 이들은 미학과 도덕적 가치 너머에서 작용하는 정신적 중요성을 자연 상태에서 발견해 왔다. Thoreau, Muir, 그리고 그들의 계승자들은 자연적 경험은 자연에서 그리고 그 너머에서 신에 대해 알기 위한 기회와 고무의 원천이라고 주장해 왔다. 숲과 바람이 몰아치는 산들은 호기심과 경외심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고요함과 고독 가운데서 우리는 존중심을 배우며, 그것은 기술 만능 주의와 자연을 정복하려는 시도들에 대한 해독제(해결책)이다. 자연에서 우리는 인류가 정신적인 존재이며 단지 소비자(파괴자)들이 아님을 발견한다. 오랫동안 계산적인 이성(합리적 이성)에 의해 억압되어 왔던 우리의 상상력과 기본적인 직관 능력이 일깨워지고 표현되어질 수 있다. 자연은 전적으로 다른 별개의 경험들이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거룩한 장소이다. 한 조사 보고서는 Sierra Club 회원들의 대다수가 미학적이고 정신적인 경험들이 휴양과 자원 보호 보다 자연을 보존하는 동기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함을 알려준다.
이에 더하여 자연을 보존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는 과학적 조사에서의 유용성과 멸종 위기에 처한 종들을 보존하는 역할 때문이다. 생태학은 신생 학문이며, 생활 공동 사이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조사하기 위하여 “자연적 도서관”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미개척의 지역은 우리의 간섭(개발)의 영향을 연구하는 것의 데이터 베이스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는 David Brower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세계의 사라져가는 잔존”이라고 부른 것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인류는 매일 100종을 멸종시키고 있으며, 수백 만년 동안 쌓여 온 유전학적 정보들을 가진 도서관을 파괴하고 있다. 이 유전학적 상이점들의 저장고는 대체되어질 수 없는 자원이다. 유전적 변형이 미래에는 품종을 개량하는데 유용할지도 모른다고, 또는 농업이나 의학적 연구에서 중요한 실마리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발견될 지도 모른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러한 유전적 상이점들은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생태계의 안정성을 강화시켜 준다.
자연 상태의 보존은 공해 감소처럼 그것이 인류에게 주는 이익을 언급함으로써 정당화할 수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이 간단한 제안을 하려고 한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도구적 견해를 넘어 비인간적인 생명도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다. 볼 수 없는 인간의 이익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에 대한 인간의 의무는 비용-이익 분석에서 결과적인 양을 정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 상태와 멸종 위기의 종들을 보존하는 것은 공해 감소의 방법처럼, 직업과 경제 성장과 지역 발전이라는 피할 수 없는 문제와 관계된다.
2. 미래 세대에 대한 의무
기술의 많은 환경적인 영향은 점증적이거나 오랜 기간에 걸친 관계이다. 자원 고갈과 환경오염에 의해 우리는 우리 후손들의 행복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인구 증가, 토양의 부식, 새로 생산되지 않는 에너지 자원의 사용은 다가올 많은 세대 동안 인류의 생활을 위협할 것이다. 일 만년 후에는, 우리의 핵 발전소로 부터의 방사능 폐기물은 그것에 누구나, 노출될 위험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나 오존층의 파괴는 인류를 영구히 위협할 것이다. 이러한 정책 이슈에 있어서 후세에 윤리적인 의무에 대한 밑바탕은 무엇인가?
많은 공리주의자들은 후세에게 약간의 조언을 남겼다. John Stuart Mill은 “인류의 대중적인 흥미”를 이야기했고,“인간 모든 세대가 하나의 상에 확고히 일체가 되었다”라고 묘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실상 가장 많은 이익을 가장 많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하였다. 동시대의 공리주의자 J.J.G Smart는 모든 세대는 동등하게 같은 원칙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상 일상적인 우리의 행동의 더 먼 영향은 너무 작거나(풀에 던진 돌에 의한 잔물결과 같은 흩어짐) 설명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그는 만약 오랜 기간의 영향이 파멸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면(핵전쟁이나,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된 경우처럼) 그것들은 우리의 계산에 샘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의무가 있는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상황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 요구를 주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은 권리가 없다. 몇몇의 공리주의자들은 그러한 사람들(죽은 자)에게 대해 자애로울 의무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을 산출할 의무는 있다. 악에 대한 선의 균형을 증가시키는 의무는 개인들의 상술(명확히 말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누구에게나 의무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권위자들은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인 사회의 가능성 있는 구성원들처럼 미래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무들은 더 떨어진 세대들에 대해서는 줄어든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회적인 생각은 우리와는 매우 다를 수 있는 그들의 생활 조건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 미래에 우리의 행동의 결과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공리주의자들은 늘 미래에 대하여 고려치 않는다. 낮은 가능성 또는 큰 불확실한 사건은 비용 이익 계산에서 낮은 비중을 차지한다. 경제 시스템 또한 짧은 기간의 이익에 우선권을 둔다. 만약 내가 이윤 7%에 내 돈을 투자한다면, 지금으로부터 10년 후에 100달러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천연자원이 지금 나에게는 단지 50달러의 가치이다. 민주정치의 과정은 미래를 고려치 않은 이러한 경향을 정책 결정에서 강화한다. 2년내지 4년마다 선거하는 정치 체제는 신속한 결과와 현유권자들에게 맞추어져 있다. 탄생하지 않은 시민은 투표권이 없다. 미래를 고려치 않는 또다른 요인은 기술의 진보가 환경과 자원 문제의 해결책을 공급할 것이라는 널리 퍼진 확신이다.
이 장 후에 나는 잠재적인 오랜 기간 동안의 영향이 현재의 실천 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불확실성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리로부터 더 먼 미래에 대한 결과를 아주 작게 비중을 두기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균등한 시간 에누리는 문제이다. 잘 이해된 먼 효과는 빈약하게 이해된 짧은 기간의 현상 보다 큰 확신으로 예언될 수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과대 평가하려고 불확실한 위험을 과소평가 하려는 것 같다. 직면한 불확실한 시간 할인의 소개보다도 더 우리는 평가의 범위를 주어야 하고 그들의 시도를 강조해야 한다. 반면, 사건의 불가능은 그것의 위치에서 시간을 고려치 않는 그 결과는 더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명확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파멸적인 결과의 작은 가능성은 표준의 위험 비용의 계산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후대에 대한 의무는 세대간의 공정한 생각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몇몇의 권위자들은, 그들이 속하게 될 세대가 어느 것인지를 모르는 “original position"가설의 계약자들을 위한 Rawl's Model을 발전시켰다. 만약 당신이 어느 세대에 태어날 것인지를 모른다면, 당신은 기술에 관계된 정책과, 환경의 파괴와 관련된 정책을 추천할 것이다. 어떠한 정책이 모든 세대에 대표자들의 모임에서 채택될까? Rawls는 우리에게 가장 적은 유리한 점이 있는(좋은 환경에서 사는)가에 관해 생각해 볼 것을 요구했다. 시간의 위치를 무시한 미래 세대에 비유한다면, 현 세대는 경제적 발전과 기술에 관해서는 적은 이익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자원과 환경에 관해 더 많은 좋은 것을 가진다.
사실상, 미래 세대에 대한 정책 결정에서 긴 기간을 고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재생 가능한 자원의 경우는 생선, 목재, 구리와 같은 그러한 같은 결과는 가장 적은 지속적인 생산을 함으로서 얻어진다. 가장 많은 지속적인 생산은 과도한 생선잡이, 목재의 벌채, 토양의 부식에 의하여 그 한도를 초과하게 된다. 그리고, 농경지는 빠르게 감소된다. 사람들은 무한히 계속되는 이익에 살기보다 생물학적인 자원 생산품을 소비한다. 그들은 자식과 손자들의 건강을 도둑질하고 있다. 안정된 인구를 고려한 세대들 간의 공정한 분배는 오늘날 생태계의 지식으로부터 한결같은 생산을 유지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불확실한 미래는 어떤 것은 보다 나은, 어떤 것은 보다 낮은 결과를 보여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용 정도는 새로운 정보의 관점에서 재정리될 수 있다.
광물과 화석 연료와 같은 재생산이 불가능한 자원을 고려할 때 세대간의 공평은 자원고들이 모든 세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것에 대한 권리 때문에 기술에 의해서 그것의 사용 기간이 연장될 수 있는 속도 보다 더 빨리 써 버리지 않도록 요구한다. 기술은 이전에는 쓸모없던 금속 광물과 같은 천연 자원을 유용한 것으로 바꾼다. 자원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미래 세대를 위하여 자원 감소의 영향을 상쇄시키기 위한 발전된 기술과 재원 투자를 물려주므로 그들에게 보상해야만 한다. 만일 기술에 대한 상대적 자원고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에게로 보존되어 전해진다면, 그것은 모든 세대를 위하여 보존될 것이다.(보존되어야 한다.) Brian Barry는 그 기준은 생산적 잠재력을 고려할 때 기회의 균등히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자원 고갈에 의해서 잃어버린 생산 기회의 대체를 위하여 향상된 기술을 물려주어야만 한다.
대략 1970까지, 기술은 소비를 상쇄시키는 것보다 더 빠른 율로 자원고를 확장시켰다. 새로운 추출 기술은 저 등급의 금속 자원을 경제성이 있게 만들었고, 발견들은 부존자원의 견적을 늘렸고, 희귀 금속들을 위한 대체 물질들이 발견되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광물과 천연자원들의 가격이 1900년에서 1970년까지는 일정하게 유지되거나, 하락하였다. 그러나, 1970년에서 1980년대에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은 보다 많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들의 사용이 증가되게 함으로 몇몇 자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기술적인 지식은 후세에게 매우 중요한 유산이다. 그러나, 유독 쓰레기, 오염, 그리고 환경의 쇠퇴(파괴)하에서의 기술의 방향없는 적용은 비록, 산업화와 오염 통제에서의 향상이 어떤 경우에는 건강과 환경에 대한 이러한 위협을 상쇄할 수 있기는 하지만 증가하는 위험을 후손에게 물려준다. 어떤 자원은 기술적 발전과 경제적 성장에 매우 큰 공헌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 자원의 90%가 단지 소비재로 사용되고, 단지 10%만이 후손에게 유익을 줄지도 모를 재원 축적이나 기술적 장치들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후손들에게 전해질 위험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특히 윤리적 관련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들은 현재의 상황에 아무런 주장도, 결정 사항에서 어떤 목소리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타의적으로 강요받는다. 둘째, 만약 후세에 대한 위험이 현세대의 주된 이익 때문에 발생(방사능 폐기물같은)한다면 배분에 대한 공평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나, 손자녀들이 지불해야 하는 거대하고 다양한 빚을 져 왔다.:자원 고갈, 환경 파괴, 그리고 다른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어진 정부의 주된 부분의 재원과 같은 막대한 빚을 말이다.
후세의 필요와 관련된 것은 현재 살고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과 중복된다. 긴급한 필요들은 불확실한 미래의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 그러나, 후세의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현재의 사치스러움보다 더 중요하다. Barry는 산업국과 개발도상국간의 기술과 재원의 교류는 세대간의 그리고 국가간의 공평을 동시에 만족시킬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의 책임은 단지 우리의 후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간에 미래의 모든 세대-특히, 에너지와 다른 자원들의 값이 쌀 때 산업화를 이루지 못한 세대-에게 책임이 있다. Barry는 자원의 막대한 양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원칙적으로 부과되는 국제 소득세를 제안한다. 그러한 세금은 영향이 적을 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시공을 초월한 공평이 조화될 수 있게 하는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긴 기간에 걸친 선구적인 계획은 우리가 과거에 채택했던 것보다 더 수평적으로 넓은 시간을 요구한다. 우리의 행동의 예측 불허의 결과를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도덕적 공동체는 시간과 공간 모두에서 확장된다. 사회가 지속될 수 있기 위하여 변화가 지금 시작되어야 한다. 인간의 고통에 있어서 보다 큰 종소리가, 만약 그 변화가 우리의 후대에게 강요된다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뒤에서 인류의 유지를 위한 중요한 단계로서 보다 적은 자원 소비 기술과 부유한 나라에서의 검소한 생활 습관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것이다.
3. 모든 생물체에 대한 경외감
환경을 보존하기 위한 단호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것이 신중히 검토되고 있는가? 거시적으로 볼 때 인류 자신의 이익을 의해 다른 종의 보호를 위해 힘써야 할 강력한 이유가 있는가? 우리에게 이로움은 그만두고라도 다른 생명체들이 그 자체로 존귀한가? 인류가 빚어낸 파생물들이 아닌 다른 형태의 생명체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의무가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그리고 칸트는 서구의 대부분 철학자들과 더불어 동물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인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성만이 인간과 비인간의 명확한 구분 기준이며 우리가 도덕적 책임을 갖는 한계의 기준 점이 되었다. 반면, 몇몇 공리주의자들은 최고의 행복을 다른 생명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벤담과 밀은 우리는 동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동물들이 도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생물이 도덕적 책임이 대상이 될 수 있도록 결정하는 것이 이성이 아니라 감각성이라고 말했다. 공리주의자들은 19세기 동물의 인간적인 취급을 위한 운동에 활발한 활동을 했다. 스마트는 당시 많은 공리주의자들을 대변했는데 그는 모든 감각력있는 생명체의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표를 지키려 했다.
피터싱어의 “동물 해방”은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책임의 한계를 확대하고 있다. 그는 인류 자신만의 구성원에 윤리적 관심을 제한하는 ‘인간중심주의’를 비난했다. 우리의 윤리적 책임은 기쁨 또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어떠한 유기체에라도 확대한다.(그는 ‘새우와 굴의 사이에 있는 어느 곳에서든지’라는 글을 사용했다.) 싱어는 사육되고 옮겨지고 도살당하는 소와 가축의 고통은 공통된 것이라고 상세히 보고했으며 끝으로 채식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동물을 학대할 권리가 없다면 동물도 최소한 학대받지 말아야 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런 권리를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다른 생명체의 상응하는 귄리에 비해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이러한 견해로 볼 때 우리는 자연의 무감각한 부분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것을 주시하라.
최근에 동물의 자비로운 취급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더욱 확대되어 왔다. 그 관심의 목적은 농장의 동물, 과학의 연구 대상 동물, 생산 실험용 동물의 고통을 줄이자는 것이다. 더더욱 과격한 동물 권리 주창자들은 실험실에 침입하여 동물들을 풀어 주고 그들의 목적을 대중에게 알렸다. 1885년에 미국 의회는 실험실 동물에 관한 취급의 기준을 법률화하고 실험 시설과 방법을 조사토록 지방 조사위원회에 요구한 동물 복지 조항에 관한 수정 법안을 통과시켰다. 동물 권리 주창자들은 조직 배양과 컴퓨터 시뮬레이션 등과 같은 더많은 연구 방법의 대체를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 과학계에서는 동물 실험이 인류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필연적인 고통을 감소시키는 방법일지라도 동물 실험이 계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몇몇 철학자들은 모든 생명체를 포함하는 윤리적 사고의 범위를 넓히기를 바란다. 우리의 행동이 생명체에게 이로움도 또는 해로움도 될 수 있다. 나무 또는 식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지만 스스로 존속하고 스스로 치유하며 이로움 또는 해가 되는 상태가 존재한다. 케네스 굿 페이스터는 살아 있는 생명체는 절대적 권리를 갖고 있지 않지만 윤리적 사고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도 권리와 필요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윤리 의식을 존중하는 생명체를 주장했다. 도날드 쉐러는 개개 생명체의 번영을 촉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개개의 생명체들이 항상 집단과 생태계 내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지만 우리는 생태계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개개의 생명체들에 충실해야 한다. 로빈 애트필드는 무감각한 생명체들의 복지까지도 포함하는 확대된 공리주의를 발전시켰다. 모든 생명체는 우리의 행동에 의해 더 깊어지거나 방해될 수 있는 권리와 본유의 능력이 있다. 여기서의 목표는 고통의 회피가 아니라 생명체 복지의 증진이다.
나는 모든 생명체의 복지가 신중히 고려되어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서로 다른 생명체의 복지가 상충할 때 차별의 원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믿는다. 만약 생명이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근원이라면 인간과 비인간의 이익이 공존할 수 없을 때 어떻게 우선권을 정할 것인가?
알프레드 노쓰 화이트헤드와 제자들의 “과정 철학”이 이런 점에서 나게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우선권의 배분 원칙과 더불어 인간과 비인간을 경외시 해야 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겉으로 관련된 물체의 집합체보다는 오히려 상호 작용하는 사건들의 짜임새로서 실체를 보는 유기적 견지가 생태학적 관점과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상호 의존의 체계는 생태계의 윤리관과 비슷하지만 문제점은 전체가 아니라 개개인에 있다. 과정 철학은 근본적으로 단원적이기 보다는 복합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 존재에 많은 평준화가 이뤄졌고 모든 것은 더 거대한 전체의 부분이지만 모든 개개 존재는 그 자체로써 중요하다.
과정 사상은 인간 중심의 견지로서가 아닌 상태에서 인간 요구에 대한 우선권을 제공한다. 화이트헤드의 현실성에 대한 강조와 변화, 세상을 창조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인 것은 인간과 비인간과의 두드러진 차이가 없다는 진화론적 생물학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과정 철학은 모든 실체를 기본적 범주의 동일한 것으로서 묘사할 수 있다. 모든 실체는 적어도 기본적인 경험의 중심부이다. 복잡 다양한 생물체 사이에 어떠한 명확한 선도 그을 수 없다. 그러나 많은 계층에서 경험의 강도, 폭과 근원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인간은 곤충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한 경험을 할 수가 있다. 그러니 침팬지나 돌고래의 경험 수준은 곤충보다는 인간의 경험 수준에 가깝다.
존 캅은 환경 윤리관에 대한 과정 사상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물론 완성된 인간은 경험의 중심이며 그 경험은 유일한 고유의 이득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모든 인간은 또한 다른 존재의 경험에 기여하기도 하며, 그 경험으로 기구적인 이득을 얻는다. 우리의 목표를 단지 고통의 감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극대적인 증대와 모든 생명체의 잠재성을 일깨우는데 두어야 한다. 캅은 경험의 풍부함, 정도, 복잡성으로 구별의 기준을 정하자고 제안했다.
과정 사상은 존재가 달성할 수 있는 고유한 유용성과 기구적 유용성 모두에서 존재들 간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바위 덩어리는 완성된 중심이 없는 다만 하나의 뭉친 물질에 불과하다. 세포의 생명이 식물 전체 생명에 좌우하지만 식물은 각 세포의 경험만큼 집적된 경험의 중심부가 없다. 더욱 발달된 존재는 다른 존재의 경험에 더 큰 이득을 줄 수 있으며 기여할 수도 있다. 단순한 생명체에게서 기본적인 감정이 존재하지만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로 볼 때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암세포나 말라리아, 병원균 모기를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만약 굶어 죽어 가는 아이들에게 동물의 희생을 댓가로 영양분을 섭취시킬 수 있다면 그러한 고통은 정당화될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귀중하지만 그들은 동등하게 귀중하지는 않다.
수잔 암스트롱 벅은 “과정적 견해”를 한편으로는 동물의 권리와 또다른 한편으로는 생태계 윤리관과 비교해 본다. 그녀의 과정 사상은 동물 권리의 이기주의와 생태계 윤리관의 집단주의 모두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정 철학은 그들 개개인뿐만 아니라 그들의 연관성도 중요시한다. 그것은 상충되는 이익의 차별의 기준을 세우는 이러한 다른 견해들과 차이점이 있다. 과정 사상에서 우리는 더 중요한 경험에 의해 존재에 대한 더 큰 의무를 갖고 있다. 유사하게도 제이 맥다니엘은 경험의 풍부함과 범위의 차이는 상반되는 요구의 판단 근거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과정 사상은 모든 형태의 존재는 신에 의해 평가되고 신의 경험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과정 사상가들은 신성한 삶에 동참하므로 서 모든 존재의 의미가 생긴다고 본다. 멸종 위기에 처한 종의 보호는 그들 자신을 위해서 또는 생태계의 다른 구성원들을 위해 고려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의 생활은 창조된 질서의 다양성으로서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모든 생명체는 그 자체로서, 다른 생명체에게 그리고 신에게 귀중한 것이다. 과정적 견해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경외로 통하고 인간에게 두드러진 가치의 부여와 그들이 서로 상충될 때 그들의 상대적 중요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통한다.
Ⅲ. 종교와 환경 문제
이제 환경 윤리관의 근원으로서 과학 철학에서 종교적인 면으로 시야를 돌려보자. 서구 종교는 자연과의 조화를 빈번히 목표로 삼았다. 성경의 유산은 땅에 대한 관심을 지지하는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 결국 몇몇 독창적인 작품들은 당시 신학 테두리 안에서 이전에 제시된 과학적 철학 사상과 특히 잘 어울리게 되었다.
1. 동양의 종교
간략한 요약으로 자연에 대한 동양 사상의 풍부한 다양성을 공정하게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서구 전통 사상과는 대조되는 점들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도교는 세상을 생태계에서 한 유기체로 묘사한다.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전체의 부분으로서 서로 얽힌 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모든 특별한 존재는 분화 이전 복잡성 속에 존재하던 알려지지 않았던 도교의 주장이다. 인류는 더 광대한 우주 질서의 한 부분이다. 자연계와의 조화로운 관계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의 요구에 적응해야 한다. 조화로움과 전체의 회복을 위하는 길은 순응, 평온, 비훼손 즉 ‘있는 그대로 두어라“에 대응하는 능력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자연에 대한 사랑은 그 나라의 시와 그림들을 보면 명백하다. 심지어 농업과 경작조차도 정복보다는 자연과의 협동으로 나타내고 있다.
도교인들의 용어인 “WU WEI”는 게으름을 의미하기보다는 물질의 진정한 본질과의 도화를 이루는 행동을 의미한다. 자연 과정에 적응함으로써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가 얻어진다. 인류와 자연은 친밀한 관계가 있으며 도교의 모든 주장에는 존재론적 특징이 있다. 그러나 존재는 정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동적이며 세상에는 창조적인 자발성이 있다. 유명한 음과 양의 상징인 검정과 흰 부분은 서로 맞물려 흐르지만 그들은 함께 완전한 원을 이룬다.
조셉 니덤의 획기적인 연구인 과학과 중국의 문명에서 도교 주의자들의 존재론적 가정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그들의 목표는 자연의 비재라기 보다는 조화적인 적응이었고 인간은 자연 일부의 사상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기계적인 시계, 증기기관, 활자, 화약과 자석 컴퍼스 등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서구를 앞질렀다. 도교 주의자들은 과학 기술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에 대한 간섭은 반드시 생명의 정체를 경외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의학은 균형있고 조화로운 존재론적이며 탐구된 업적이다.
물론 중국 역사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도교인들의 신비론과 존재론을 탄생시킨 문화는 또한 공자의 교리 질서 원칙에도 수용되었고 기하학적 형태를 엄격히 따르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건설과 공학의 거대한 업적을 이루도록 황제를 부추겼다. 더욱이, 모든 문화에 있어 이상과 실제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행동은 사회적, 경제적 힘과 신앙심뿐만 아니라 제도적 구조의 산물이다. 환경 파괴가 고대 중국에서 전혀 없지는 않았다. 일례로 나무는 건축, 연료, 야금용 목탄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 산림 벌채는 결국 방대한 토양 부식의 결과를 낳았다
중국에서의 변화는 20세기에 들어서 주로 서구 영향의 결과로 일어났다. 중국 공산당은 자연은 정복되어야 할 물질로 간주하는 막시스트 주의를 받아들인다. 마오쩌뚱은 자연과의 전쟁을 외쳤다. 많은 공식 석상에서 자연을 분명히 인간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해야만 하는 적으로서 표현했다. 환경 측정 시설들이 갖추어 졌을 때 그 목적은 주로 공중 위생 및 건강을 개선하거나 산업 쓰레기의 재활용이었다. 재식림과 급수 관리등 주요 사업 계획들은 인간의 가중되는 요구에 맞춰서 발전되어 왔다. 중국에서의 인간의 착취의 확대를 고려한다면 혁명 정부가 사회를 위해 자연을 주로 착취되어야 할 자원으로 보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과거 중국의 특징적인 농업의 태도로부터의 중요한 변화를 나타내지는 못한다.
선불교는 도교와 대승 불교의 결합으로 중국에서 생겼으며 일본에서 보다 발전했다. 여기서 또한 인간과 자연과의 긴밀한 관계가 강조되었다. 선불교에 따르면 자아와 타인의 출현은 즉각적인 경험에서 알 수 있다. 해석적인 이성 또는 개념적 추상이 아니라 직관과 개인의 지각은 주관과 객관의 결합을 파헤친다. 선불교 전통에서 자연은 깊이 생각되어져야 하며 지배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사해야 할 대상이다. 인간은 조심스럽게 자연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자연에 잠재하고 있는 아름다움과 힘을 밖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 선불교에서 이런 미적 요소는 화초 배열, 차예법, 정원 등의 일본 문화 정서에 많이 포함되었다. 모든 “WABI” 예술은 우아함, 엄숙, 조용함, 단순함 그리고 미적 균형에 그 가치를 둔다. “HAIKU“로 알려진 단편 시에서 전형적인 자연의 과정이 보이는 순간 속에 아름다움, 조화와 존재의 동적인 유동을 묘사한다. 정신적인 지각으로 통하는 길은 사람을 자아의 강박 관념으로부터 또는 물질적 소유의 선취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목적은 욕망의 통제로부터 해방과 자유로움이다. 불교의 윤리관은 겸손함, 검소함과 연민, 봉사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에서 몇몇 불교의 형태를 포함하는 다양한 종교적 전통이 있다. 일본 고유의 “SHINTO” 유산은 우주의 신성함과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 일본의 산업화는 주로 서구 영향의 결과로 생겨났다. 서구의 영향으로 생긴 양상은 전통적 자연관과 엄청난 불화를 갖고 있다. 전후 기간 동안 급속한 경제 성장이란 하나로 집약된 목적을 추구했기 때문에 일본은 1965년에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오염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인체의 유해함을 다룬 대중매체가 출판된 후 많은 시민 단체가 생겨나고 1970년에 정부는 대기와 수질 오염을 다룬 세계에서 가장 야심찬 법률을 제정했다. 1975년 이루 법률 적용은 둔화되었고 보수적 정부는 마지못해서 산업을 반대했지만 이러한 법률로 환경문제는 현저하게 향상되었다.
일본에서 주로 인간의 보전에 위협적인 것을 다루었으므로 야생 동물 또는 주위 경관을 보존하는 역할은 거의 하지 못했다. 사실 일본의 행동은 멸종 지경에 이른 종에 대해 매우 파괴적이며 바다에서 고래를 죽이거나 아마존 유역에서 벌채를 하든 지간에 국제 협상에서 일본은 격렬하게 환경 제약을 반대했다. 이것은 경제적 입장이 현대의 산업화된 국가를 좌우한다는 근거이며 또한 불교가 현재 일본의 세속 주의 속에서 미소한 힘밖에 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제임스 화이트힐은 오늘날 일본에서 만연된 불안정과 불확실성이 존재한다고 했으며 만약 과학 기술에 대한 자신감의 몰락과 문화적 위기가 닥치면 전통 종교 사상이 창조적 역할을 할 것이라도 주장했다. 인간의 건강이 위태롭지 않을 때조차도 자연, 시, 예술에 대한 존경의 우산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에서 정치적 입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도교와 선불교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확신한다. 특히 서구에서 무시되었던 조정의 원칙과 자연에 대한 존경에 대해서. 그러나 대부분 서구인들은 이런 종교와 익숙하지 않다. 더욱이 동양 전통은 사회적 정의에 대해 언급한 바가 별로 없는데 이것은 오늘날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유산의 무시되어 온 부분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줄 동양 사상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력보다 유망한 이용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2. 역사상의 기독교
자연에 대한 성경의 태도는 고려할 만한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다. 창세기 첫장에 “대지를 기름지게 하고 번성시켜서 가득 차게 하고 넘치게 하여 물고기와 새와 살아 있는 모든 것으로 가득 차게 하여라.(1:28)”이라는 임무를 포함하고 있다. 인간은 단지 신의 영상 속에서 만들어졌으며 모든 다른 생물로부터 구분된다. 또한 자연 속의 성경의 영역 안에서만 묘사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신만이 자연이 형태를 가지기 전의 역사적인 사건들까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고대의 어떤 종교들보다도 헤브라인의 전통은 자연에 대한 신의 초월과 인간에 대한 특수성을 강조했다.
많은 저자들은 영토에 대한 성경의 이상이 서구에서의 환경 파괴적인 태도의 주된 역사상의 근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널리 인용되고 있는 논제에서 린 화이트는 성경의 관점에서의 인간과 자연의 분리를 묘사하고 있다. 화이트는 기독교가 자연에 대한 인간 중심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에 환경 위기라는 커다란 속죄양들을 낳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화이트가 취했던 두 가지 형태, 다시 써서 첫째, ‘기독교적인 생각에 집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호이트는 서구의 역사 속에서 다른 산업적인 태도의 원천을 무시했다. 예를 들어,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생각들 또한 서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묘사했던 인간과 다른 생물과의 차이는 이성에 대한 인간의 유일성에 기초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창조물들은 심사숙고하는 행동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인간만이 신의 유일한 혈족이며 식물과 동물의 가치는 인간 생존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진술했다. 소토아 학파의 저작에서 키에르케고르는 동물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존중할 만한 아무런 의무도 없다고 주장한다. 초기 중세시대의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영원한 것은 자연의 세계에서 단지 불완전하게 표현된다. 영지교도와 마니교에게, 자연이란 인간의 영혼이 죄악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찾는 영역이다. 반면에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관점은 매우 다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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